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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도둑처럼’ 찾아와 죽음과 폭력의 기억을 남기고 사라진 1991년

by 북콤마 2023. 2. 8.

서로 달리 기억되는, 그러나 잊힌 1991년

 

30년 한 시대가 흘러 거리에 묻힌 지금, 잊힌 1991년을 다시 꺼내본다.

 

도둑처럼 찾아와

누군가에게 1991년은 잊힐 수 없는, 계속해 해석의 재소환을 요구하는 시기로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해 5월 투쟁을 “도둑처럼 찾아”왔다가(김원, 2011) 그 격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서럽고 처절한 투쟁이 그만 종결되기를 원했기 때문”(김정한, 2020)에 조용히 종결됐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질문을 상기시키는 기억으로 남겨두고 있다.

 

1991년 5월

1991년은 격동의 해였다. 특히 5월에 많은 일들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해의 일들은 한 해 전에 이뤄진 민자당 3당 통합의 후과로서 전개된 것인데, 집권 세력 내의 분열과 경합, 이와 맞물린 야당의 복잡한 대응, 1987년 이후 영향력을 키워온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 세력의 대응이 더해져 양상이 매우 복잡해졌다.

 

강경대 사망

국회상공위원회 의원 외유 비리 사건과 수서 비리를 둘러싼 공방에서 시작해 공안 정국이 이어졌고,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하자 그에 대항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1991년 5월 투쟁’ 국면이 지속됐다. 그리고 그 ‘토끼몰이 진압’ 과정에서 5월 25일 또다시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사망했다. 이 국면에서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부터 시작해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을 포함해 8명이 잇달아 분신하는 등 총 13명이 숨졌다.

 

강기훈 구속

공안 정국하에서 수많은 조직 사건들이 발표되고 많은 활동가가 검거됐고, 정권은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구호에 호응해 분신한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여론 몰이에 나선 끝에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을 구속함으로써 반전을 시도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결국 6월 29일 범국민대책회의가 명동성당 농성을 자진 해산했고 여름에 접어들면서 1991년의 저항은 종료됐다. 그리고 하반기 들어 9월 17일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12월 9일 ILO 가입, 12월 13일 남북합의서 발표,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 같은 굵직한 사건이 이어지며 긴 한 해가 끝났다.

 

1991년, 잊힌 에피소드

‘종로’와 ‘시청 앞’으로 상징되는 저항의 공간에 쏟아져 나와 정부의 통제력을 마비시킨 정도, 전국적 참가 규모, 범국민대책회의를 중심으로 한 외형적 규모에서 보면 ‘1991년 5월’은 ‘1987년 6월’에 결코 뒤지지 않고 ‘2016~2017년 촛불’에도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른 두 시기에 대한 연구와 기록이 넘쳐나는 것과 비교해보면 1991년은 ‘잊힌 에피소드’ 정도로 남아 있을 뿐이다.

 

PD3파 통합

또 다른 누군가에게 1991년은 한 해 앞서 힘든 노력 끝에 세워진 전노협에 대해 해소 논란이 시작되는 기점이자 불행한 민주노총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그뿐 아니다. 이른바 ‘PD 3파’(또는 4파)는 인민노련의 신노선을 중심으로 통합을 추진해 그해 6월 11일 조직을 통합했다. 이후 1992년 초 주대환 석방 ‘탄원서’라는 것을 남기는데 이는 누군가에게는 미래를 밝히는 신노선의 출발점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대대적 전향의 출발점이었다.

 

통일운동

또 어떤 이에게 이 시점은, 평양축전이 기본 틀을 갖추고 1988년 7·7선언,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등의 방북, 노태우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등이 잇따른 가운데 1991년 들어서는 1월 연방제 통일 방안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김일성 주석의 신년사, 범민련 북측본부와 남측본부 준비위원회 수립, 범민족대회 개최, 유엔 교차 승인, 전국연합 결성, 남북합의서까지 귀결되는 그야말로 ‘통일 원년’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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