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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33년만의 진범

범행수법과 시그니처: <33년만의 진범>

by 북콤마 2020. 10. 11.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는 범인의 특이한 행동은 범행 수법(범행 방식)과 시그니처로 나뉠 수 있다.

범행 수법

범행 수법(MO: modus operandi, method of operating): 범죄가 이뤄진 방법을 뜻하고 이는 범죄 실행을 종결짓기 위한 필요한 선택과 행동으로 구성된다. 즉 범인 자신의 정체를 보호하고, 범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용이하게 도주하기 위한 선택과 행동이다.

그런데 범인 또한 자신의 범행 수법을 의식한다. 살해를 목적으로 한 연쇄사건의 범인일수록 잡히지 않고 계속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점차적으로 범행 수법을 바꿔나간다. 무사히 경찰의 수사망을 벗어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스스로 더욱 잔인한 방법을 터득하고 다듬어나가기도 한다. 우리는 범행 수법의 지독한 변모를 화성 연쇄사건에서 무섭도록 목도하게 된다.

시그니처

시그니처(서명 행동)는 범행 수법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범행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며 범인 개인의 층동이나 심리적 욕구에 따욕구에 따라 저질러지는 독특한 행동을 가리킨다. 차라리 가해자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범행을 저지르는 범행 동기에 가깝다.

‘시그니처’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평생 천착한 FBI 프로파일러 존 더글러스는 “시그니처는 한 개인의 깊숙한 내면에 숨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정적인 것이다. 나는 이 시그니처를 유동적인 범행 수법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고 나눴다.

즉 시그니처는 그래서 범인의 정체성과 관련한 것이라고 한다. 더글러스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면 ‘범인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성취하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다. 어떤 범죄 상황에서도 범인이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하는 행동이다.

범행 수법과 시그니처의 차이

더글러스는 은행 강도가 은행 안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예로 들어 범행 수법과 시그니처의 차이를 설명한다.

“가령 텍사스의 한 은행 강도의 경우를 보자. 그는 은행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옷을 벗긴 뒤 섹스하는 자세를 취하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분명 그 범인의 시그니처다. 그런 외설스러운 사진을 찍는 것은 은행털이에 도움도 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사실 그런 사진을 찍으려면 은행에 그만큼 더 오래 머물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체포될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다. 그런데도 범인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미시간 주의 그랜래피즈의 은행 강도를 들 수 있다. 이 범인 역시 은행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러나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그가 옷을 벗긴 것은 알몸이 된 사람들이 당황한 나머지 범인의 얼굴을 못 보게 하여 나중에 정확한 인상착의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것은 은행털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는 방법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MO가 된다.”(존 더글러스 <마인드헌터>)

그런데 시그니처의 문제는 좀 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 왜 연쇄사건에서 프로파일러와 범죄심리학자들은 그토록 시그니처 분석에 매달리는가. 현장에선 사건마다 범행 수법이 조금씩 다르다는 이유로 동일범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일이 생긴다. 8차 사건을 모방 범죄로 단정하고 연쇄살인에서 제외한 것도 특정 범행 행위의 유무에 범인상 추론이 고착됐기 때문이다. 유영철은 경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강을 건너 서울 강북과 강남을 오가며 범행을 저질렀고, 초기엔 노인 살해에 집중하다가 자신의 뒷모습이 찍힌 CCTV 화면이 언론에 보도된 후 성매매 여성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들여 살해하는 수법으로 범행 수법을 바꿨다.

“유영철은 주택에 침입하여 살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노상에서 성매매 여성을 거주지로 유인하여 살해하는 방식으로 수법이 변화되었고, 정남규는 노상에서 귀가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해 문이 열린 집에 침입해 범행하는 방식으로 수법이 변화되었다.”(권일용 <프로파일링 이론과 실제>)

그럼, 이제 범행 수법이 바뀌었으니 다른 범인의 소행으로 봐야 할까. 이렇게 끊어진 연쇄의 고리를 찾는 숙제 앞에서 시그니처 분석은 힘을 발휘한다. 이제 대답은 복잡한 현장 뒤에 도사린 범인의 진짜 얼굴을 찾아내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즉 범행 수법을 바꾼 이유를 찾으려면 범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유영철과 정남규를 긴 시간 면담했던 권일용 교수는 그들이 범행 수법을 바꾼 건 자신들의 심리적 장애 요인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유영철은 CCTV 화면에 찍힌 것이 마음에 걸려 4개월간 범행을 멈췄고, 평소 언론 보도를 살폈던 정남규는 피해자가 사망하지 않았거나 수사상 목격자가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수법을 바꿨다. 그러니까 시그니처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특정 행위를 찾는 작업 그 이상이다. 연쇄살인 사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범행 수법이 아니라 시그니처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화성 연쇄사건에선 무엇이 시그니처였을까

이 책에선 2차 사건 때부터 꾸준히 등장한 매듭지은 스타킹 등 결박을 시그니처로서 주목하고자 했다. 이춘재는 왜 밧줄이나 탄탄한 끈을 준비하지 않고 범행 도구로 피해자의 스타킹을 사용했을까

네이버 책소개: <33년만의 진범>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396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