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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한국의 자살률, 타국의 추종을 불허한다 / 약자의 죽음은 정치적이다

by 북콤마 2014. 9. 24.

 

___《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윤영, 정환봉 지음

 

자살(自殺, Suicide): 행위자가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가지고 생명을 끊는 행위

 

 자살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가지고 생명을 끊는 행위라고 나온다. 한국의 자살률은 각종 통계에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계 자살률 3. OECD 국가 자살률 1. 하루 평균 마흔네 명이 자살.

2012년 전체 자살률은 10만 명당 28.9. 예순다섯 살 이상 노년층의 자살 사망률은 10만 명 중 80.

자살증가율은 세계 2위로, 2000년 인구 10만 명 당 13.8명으로 2012년까지 109.4퍼센트 증가.

 

자살증가율 1위인 키프로스의 경우 10만 명 당 자살률이 1.3명에서 4.7명으로 늘어난 것이라 한국의 자살의 특징은 전 연령에 걸쳐 그 수가 많은 데다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갖는 기원은 무엇일까?

흔히 빈곤층을 취약 계층이라고 말한다. 취약 계층이란 선택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거리의 턱이 높아 다닐 수 없는 휠체어 장애인,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돈이 없어 사먹을 수 없는 가난한 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아픈 몸으로 운신할 수 없는 환자와 노인 등이 취약 계층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정말 자신의 의도에 따른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던 때에 마지막으로 떠밀려난 낭떠러지였을까?

약자의 죽음은 정치적이다. 그것은 한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한 사회가 무슨 선택을 빼앗아버렸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한겨울 혼자 방에서 잠을 자는데 보일러가 터지고 그 물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방을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 장애인에게 과연 삶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을까? 가족들이 빚더미에 올라 앉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에게는? 추운 겨울 야윈 몸 하나 뉘일 곳을 못 찾아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에게 정말 선택이 있었을까?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강철 체력을 갖춘 겁 없는 등반가라도 건널 수 없을 만큼 이미 깊은 심연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 자체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__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무상급식 논쟁에서 시작해 무상보육을 지나 2012년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기초연금 공약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마치 복지국가 만들기에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듯 보였다. 하지만 복지 논쟁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고 간 자리에 가난한 이들의 자리는 여전히 없었다.

2013년 한 해 동안 1717명이 고독사로 생을 마쳤다. 하루 평균 4.7명이니 다섯 시간마다 한 사람이 외롭게 죽어갔다. 하루 마흔네 명이 자살을 선택하고 이들을 보면 다섯 명 중 한 사람은 경제적 이유로 삶을 포기한다. 삶은 늘 아슬아슬하고 죽음은 너무 가까운 가난한 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OECD 가입 국가, 경제 대국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서 심연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2007년 이래 빈곤층은 늘어난 반면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점점 더 줄어들었으며, 구걸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거나 서울역과 같은 공공 역사에서 노숙인을 강제로 쫓아내는 등 빈민 혐오적인 정책은 관철되어왔다. 빈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 복지에 기대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같은 신문의 앞뒤 면에 나란히 실리고 있다. 이 모순된 주장의 줄다리기는 정작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가난은 운명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번개처럼 죽음에 사로잡혀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꾸준히 실패하고 다시 도전했지만 실패하는 현실이 반복될 때 절망은 천천히 나타난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도전할 일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죽음을 떠올린다. 사람은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 송파 세 모녀를 기억하고 잊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이러한 비극을 맞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송파 세 모녀를 기억하기 위한 첫 시작점은 가난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이들과 빈곤에 빠져 절망하는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