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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판결2008~2013년92선

머리글 <올해의 판결> 최우성 편집장

by 북콤마 2014. 3. 26.

최우성 <한겨레21> 편집장이 쓴 머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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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판결에 대하여

 

20121217일 발행된 <한겨레21> 941호 표지엔 잘 가라, MB, 잘 가라, 삽질 법들이여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쓰여 있었다. 18대 대통령선거를 이틀 앞둔 날이다. <한겨레21>은 이명박 정부 집권 첫해인 2008년부터 해마다 연말에 올해의 판결을 선정해 표지 이야기로 실어왔다. 이때가 한 정권의 끝물인 201212월이었으니 그해 올해의 판결을 기획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마감하는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상식과 품격, 이성과 공존의 가치가 하무하게 무너지고, 그 자리를 토건과 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간 MB 시대 5년이었다. 드디어 이를 떠나보내는 <한겨레21>의 마음속엔 분명 새 시대를 기다리는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운명은, 보기 좋게, 희망을 무릎 꿇렸다. 우리는 그사이 또 한 해를 흘러 보내고 2014년 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들은 하나같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징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주요 국가기관이 지난 대통령선거에 불법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이를 밝혀내려 애쓰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밀려나고 있다. 때 아닌 공안정국은 우리 사회의 시곗바늘을 30, 40년 전으로 되돌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모두가 2013, 그러니까 새로 탄생한 박근혜 정부의 집권 첫해에 여름철 소나기 쏟아지듯 몰아친 일이다.

  최근 들어 사법부의 판결에 웃고 우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퇴행적인 보수·수구 성향의 정권 아래 공공성과 시민사회의 공간이 점차 위협받고 있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사법부의 움직임에 예전보다 더 많은 눈길이 쏠리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 이중적이고 양가적 의미를 지니는 현상일 게다.

한편으로는 사법부가 고삐 풀린 권력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걸 떠올리게 한다. 물론 사법 정의가 제대로 살아 숨 쉬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이해 갈등을 조율할 사명을 가진 정치 영역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해 생겨난 사법 만능주의일 수도 있다. 시민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역량이 갈수록 부족해지는 작금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어찌 보면 1987년 민주화 이후 사반세기 세월이 흘렀음에도 시민사회가 아직 토대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자칫 사법 만능주의가 법치주의의 강화를 내세우는 정권의 퇴행적 행보와 맥이 닿아 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또한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한겨레21>이 그간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해온 올해의 판결기획은 사법부를 향한 날선 채찍질이자, 매서운 감시 운동이다. ‘주목할 판결문제적 판결로 시야를 넓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 단행본 1권으로 묶인 6년간의 기획 기사는 사법부의 판결이라는 거울에 비친, 이명박 정부 5년과 박근혜 정부 첫해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헌법적 가치가 무참히 짓밟히고 시민의 소중한 기본권이 마구 훼손되는 상황에서 올해의 판결이 떠안아야 할 몫은 더욱 커질지도 모른다. 분명 힘들고 고된 작업일지언정 앞으로도 <한겨레21>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기록에 대한 사명을 꿋꿋이 이어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