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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본문 1장 소개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by 북콤마 2016. 9. 19.


김찬호 선생의 인터뷰 '인간의 격' 중 '사회에 여백이 없어졌다'

'책읽는사회'가 만드는 문화웹진 '나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it.ly/2d5hjA8


* 사회에 여백이 없어졌다


선생은 ≪돈의 인문학≫에서 위세에는 두 가지 얼굴, 즉 허세와 위엄이 있다고 지적했다.

위엄이라고 하면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나오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적 자아의 모습에 가깝다. 타인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를 가지되 그리움 속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신이다. 위엄은 사람들 사이의 외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공간을 발견하는 데서 온다. 그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확인받아야 할 때 허세로 드러난다.

우리의 위 세대는 고도성장을 압축적으로 겪어오면서 자기 삶의 정당성을 제한된 한두 가지 가치에서만 확인받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제한된 가치 체계는 아래 세대에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인가’ 계속 질문하게 된다. 성형수술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 체계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추구하는 데 여러 맥락이 작용하고 허용된다면 그것을 확인받는 자리도 다양해질 것이다. 그동안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다시 삶의 방향을 전환하면 된다. 일자리나 자산이 없는 상태라면 사회적 주류를 벗어난 삶을 계획해봐도 된다.

하지만 사회 안에서 용납되는 맥락이나 가치 체계가 제한적이면 정신의 유연성이 현격히 떨어진다. 자기가 사회가 정해놓은 일정한 기준에 미달했다고 느끼는 순간 발밑의 기반은 급속하게 무너지고 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위 세대는 절대적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만 매달렸다. 우선 결핍을 채워야 했다. 바닥까지 내려간 생존의 기로에서 어떻게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길이었다. 삶의 정당성을 채우는 코드가 획일적이었다. 그러다가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방식과 기준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상 속에서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삭막해졌을까’ 싶을 때가 많아진다. 예전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다녀올 때 항상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휴게소에서 사온 간식을 나눠먹곤 했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등고속을 예매할 때도 옆자리에 사람이 앉는 것이 불편해서 그런지 늘 일인석이 제일 먼저 찬다고 한다. 민생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의 심리는 더욱 고립되는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동물원에서는 겨울에 기온이 떨어지면 사자와 호랑이를 실내 우리에 가둬둔다. 그러다가 바닥에 싼 똥을 치우고 청소할 때가 되면 동물들을 다른 방으로 옮겨놓고 우리를 말끔히 씻어낸다. 그런데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동물들은 익숙한 냄새가 사라져버린 우리 안에서 몹시 불안해한다. 물론 요즘엔 사육사들도 동물 각각의 생태를 고려해 청소 방식에 신경을 쓸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생태를 대입해볼 수 있다.

지금 인간의 서식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인간은 어떤 경우에 당황하고 불안해할까? 인간에게는 사회라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말뜻 자체가 인간은 혼자 힘만으로 살아남기 힘든 존재임을 말한다. 인간은 사회 바깥에서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런 면에서 동물 중 인간이 제일 무능할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관계망이 필요한 존재이다. 현대적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세 가지 있다. 상품 시장과 정보 네트워크, 공간이다. 시장 원리가 사회 전역에 확대되면서 모든 것이 상품화되었다. 웬만한 문제는 돈을 매개로 한 거래로 해결된다. 예전에는 이사할 때 이웃과 친지들이 아침 일찍 나와 이삿짐을 거들었는데 요즘에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사하려면 포장이사 업체에 맡기는 것이 당연해졌다.

지나간 일이지만 예전에는 다들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다. 상품 거래가 만연하지 않던 시절에는 구매력이 없어도 생계를 마련할 길이 있었다. 시장 원리가 일상의 모든 공간을 흡수해버리자 이제 시장 안에서 돈을 벌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서 해결하는 회로만 강화되었다. 요새 젊은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상품 구매 과정을 설명할 때 예를 들어도 대형마트에 가서 장 보는 일을 말한다고 한다. 20대, 30대 교사 자신들부터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제는 말부터가 먼저 전통시장과 시장으로 구별되어 있다. 전통시장에 가서 이웃과 함께 물건을 사면서 흥정도 해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학생들에게 동네 경제를 가르쳐야 한다. 교사들이 대형마트를 예로 설명하면 삶의 풍부한 감수성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은 점점 ‘삶’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가고 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노동도, 죽음도 잘 보이지 않는다. 동네에서 장례를 치르는 풍경이 어느새 사라졌다. 상여가 문 밖을 나서지는 않더라도 장례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모습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부부는 맞벌이에 지치고 아이는 학원 공부에 지친 가정에 남은 것은 컴퓨터와 텔레비전, 휴대폰 같은 전자 제품뿐이다.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둘러보면 상품밖에 남지 않은 세상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미디어가 빠르게 대체했다.

우리는 인터넷 보급률 부문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얼마 전에 홍콩에 사는 한 아이가 소원이 휴대폰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기가 울 때는 주위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데 휴대폰이 울면 바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부러웠다고 한다. 미디어가 넘쳐나는 곳에서 인간관계는 냉랭해진다. 기차 안에서도 둘러보면 자는 사람이 절반이고, 깨어 있는 경우라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한 칸에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하다. 기차 안에서 결정적으로 사라진 풍경은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람의 모습이다.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간을 살펴보자. 서울과 수도권의 주거 정책은 건설업체에 유리한 ‘스크랩 앤드 빌드’scrap and build(낡은 건물과 시설을 없애고 새로 건설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옛날 것을 싹 갈아엎고 새로 짓는 방식이다. 얼마 전 시사 주간지에 실린 얘기인데 뉴타운이 조성된 지역은 선거에서 보수 진영의 무덤이 되기 쉽다고 한다. 선거운동을 하려면 토호 세력을 조직해 새마을운동 펼치듯 밀어붙여야 하는데 뉴타운 개발이 되면서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를 내려온 인적 기반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뉴타운 지역의 사람 살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보통 아파트 신축 공사가 마무리되고 분양받은 사람들이 입주하면 시행사는 마지막 공정만 남겨놓는다. 하청 업체를 시켜 시설의 하자를 보수해주는 일이다. 그 일을 맡은 자영업자 사장이 일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보았다. 입주한 집에 찾아갔다가 주부들한테 모욕당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공사하느라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탓도 있지만, 함부로 하대하고 무시하면서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타운 지역에 걸쳐 그런 식의 대우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뉴타운 지역이 아니라 아직까지 마을 공동체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아파트 문을 딱 열고 밖에 나가봐도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동네에 나가면 바로 아줌마들이랑 수다를 떨면서 지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끼리 자기 자신을 애써 증명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집 밖에 나가보면 자기를 보고 알은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남들에 비해 자기는 못났고, 살쪘고, 아줌마처럼 옷을 입는다고 비교하게 만든다. 그렇게 억눌린 감정 상태에 있는 사람 주위에 좀 만만한 이가 나타나면 바로 스트레스를 분출할 희생양이 된다. 그래서 시설 보수를 맡은 업자들 사이에서는 진상 짓을 하는 고객들의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한다. 그런 집에 가게 되면 문 앞에서부터 그 집 애를 보고 한바탕 칭찬을 해준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갑질’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만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은 스크랩 앤드 빌드 방식에 기초한 아파트 주거 환경에서는 삶의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이는 마을 공동체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가보면 실감하게 된다. 인천 동구 지역에 가보면 몇 곳 되지 않는 옛날 마을을 찾을 수 있다. 외지 사람이 가더라도 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지나가는 할머니들은 옷차림이 남루해도 표정에는 짓눌린 구석 하나 없고 위엄이 흐른다. 가난은 엄연하지만 자존감은 삼성 임원보다 더 높아 보인다.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들 사이를 그들은 느긋한 걸음으로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표정으로 지나간다.

우리의 삶이 힘든 것은 스펙을 쌓는 청년들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남 앞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고 상대방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는지 긴장하며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좌중의 분위기를 띄울 농담조차 하지 못한다. 농담을 하려 해도 분위기가 썰렁해질 것을 각오할 신뢰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하더라도 비웃음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흩어질 뿐이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은 주거 불안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관계망이 깨진 데에서도 기인한다. 자기를 알아봐주는 가까운 지인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삶의 피폐함을 다들 알고 있다.

정리를 해보면 인간에게 필요한 공간이라는 것은 돈이나 시장,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도 사회와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을 말하는 것 같다. 자본 시장을 통하지 않고도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타인을 만날 때 우선 확인하는 징표가 있다. 돈과 미모, 학력, 지위, 자녀의 성적 등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것들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