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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일본제국 vs. 자이니치

1장 미리보기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이범준 지음

by 북콤마 2016. 9. 29.


* 북콤마 페이스북에서도 1장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풍경__그리워 헤매던 긴긴 날의 꿈


1976년 겨울 신인 가수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1975년 시작된 재일동포의 고향 방문에 맞춰 1973년 발표했던 노래의 가사를 바꿨다. “가고파 목이 메여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혀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그리고 이 무렵 일본 도쿄발 외교문서에 외무부장관 박동진이 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었다. ‘일본 사법시험 합격자 김경득에 관한 보고’. 1976년 12월 7일자로 주일대사 김영선이 급히 보내온 것이다. 문서 번호 일본(영)725‐6904.


“10월 9일 발표한 일본 사법시험에서 27세 김경득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 465명 가운데 38등. 10월 19일 최고재판소에 사법수습생 채용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최고재판소는 ‘귀화 신청을 제출하는 것을 조건으로 수리하겠다’고 김경득에게 통보.”

1972년 김경득은 와세다대 법학부 졸업을 앞두고 교내 취업 상담실을 찾는다. 수험 정보를 얻어 시험을 쳐볼 생각이었다. 구체적으로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에 들어간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메이저 신문사나 방송사에 외국적자外國籍者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김경득은 상담실을 돌아 나오면서 결심했다. 조선인의 자아를 되찾는다. 가나자와 게이토쿠金澤敬得 대신 김경득金敬得으로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사법시험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1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험공부를 해보지만, 그렇게는 가망이 없었다. 1973년 고향집 와카야마현으로 돌아간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공사판 일을 시작했다. 운전면허가 있으면 일당을 더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학원비가 없어서 오전 4시에 일어나 큰형이 운전하던 차로 연습했다. 트럭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

한겨울이 됐다. 현장에는 찬물뿐이니 흙만 씻어내고 바로 목욕탕에 가야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김경득은 100엔을 아끼려고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큰형은 “내가 돈을 줄 테니까 뜨거운 물에 씻어라”라고 했다. 김경득은 “대학까지 나온 놈이 앞가림은 하겠습니다”라고 사양했다. 결국 시험을 치르는 데 필요한 60만 엔이 모였다. 빨래와 청소를 해준 형수에게 인사하고, 고향을 떠난다. “고맙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1974년 김경득은 도쿄로 돌아간다. 모교인 와세다대의 주물연구소에서 숙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험공부를 시작한다. 2년 뒤인 1976년 10월 9일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하지만 국적의 장벽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사법수습생은 일본국적이어야 했다. 그때까지 외국적으로 합격했다가 귀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경득은 10월 18일 도쿄 최고재판소에 사법연수소 수습생 채용신청서를 낸다. 국적은 한국이었다.

“이대로는 연수소에 못 들어갑니다. 일본국적으로 귀화해야 합니다.” 최고재판소 인사국 직원은 김경득에게 거듭 설명했다. “한국적韓國籍 그대로 채용신청서를 받아주세요. 제가 그렇게 내려는 겁니다.” 그는 한국적으로 연수소에 들어가겠다고 되풀이했다. 사법수습생 채용 요강의 결격사유란에 ‘일본국적을 갖지 않은 자’가 있었다. 최고재판소 직원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자 이를 임용과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최고재판소 인사국 임용과장 이즈미 도쿠지泉徳治의 인터뷰. “인사국 직원이 김경득에게 귀화해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경득이 한국적으로 연수소에 들어가겠다고 계속 주장해서, 결국 나한테 보고가 들어왔다.” 계속해서 이즈미의 인터뷰. “수습생은 준공무원이기 때문에 일본국적이 필요했다. 검사 수습을 하면 피의자를 조사하고, 기밀이 유지되어야 하는 재판소의 판결 과정에도 접근하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합격자 모두 귀화해서 수습생이 됐다. 일본국적이기 때문에 원하면 판검사도 됐다. 10월 19일 인사과장실 응접탁자를 두고 이즈미와 김경득이 마주 앉았다. “저는 대한민국적 그대로, 김경득이라는 이름 그대로 연수소에 들어가겠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의지는 분명했다. 이즈미의 인터뷰. “솔직히 처음에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설명을 하면 알아듣겠지 싶었다. 하지만 김경득은 단단히 공부해서 왔다. 요시이 마사아키吉井正明까지 만나고 왔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