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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닫는 글' 중에서 발췌

by 북콤마 2016. 8. 31.



<닫는 글: 민생운동을 찾아가는 여덟 개의 키워드> 중 '코디네이터''집단 자치' 둘을 올린다. 김남근 변호사의 글이다. 키워드는 '집단 자치' '이기적인 운동' '감성' '코디네이터' '분열' '신뢰' '정치권' '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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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진행하며 질문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질문자의 존재는 흐릿해진다. 설명할 시간도 부족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질문하는 쪽이 궁금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독자들을 질문자인 우리가 매일 나가 서는 민생운동의 현장으로 초대해보려 한다. ‘운동의 언어’를 따라 읽음으로써 현장의 메커니즘을 떠올려볼 수 있기를 바란다.


코디네이터

일은 시민사회단체를 찾아오는 시민과의 상담에서 시작된다. 그런 다음 전문가에게 정책적 조언을 구하고, 외국의 제도를 연구하고, 행정기관의 정책 동향을 리서치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대중들이 공감할 사실을 정리하고 관련 지식과 정보를 체계적인 이슈 페이퍼로 만든다. 그리고 개혁 의지를 가진 전문가나 지식인, 정치인 등을 조직해낸다. 준비를 마치면 정당과 언론과도 접촉한다. 이렇게 현장의 목소리와 지식과 정보, 사람을 모아내며 공동 작업을 기획하고 조직화하는 일을 하는 시민단체 운동가를 ‘간사coordinator’라고 부른다.

시민단체가 맡은 이러한 기획·조직화coordination가 우리 사회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능력과 사람을 모아내어 운동으로 분출시키는 동력의 한 줄기가 되어왔다. 나는 시민단체 간사들이나 그곳에 참여하는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가들에게 시민운동이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잘해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떤 시민단체 한 곳이 운동의 중심에 서거나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또 사회 전체에 흩어져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큰 대의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사람과 단체를 모아내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당면 과제가 발생할 때마다 피해 당사자와 결합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와 시민운동가, 정치인들을 효과적으로 잘 모아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개별 주체들이 자신들의 비중과 역할을 지나치게 내세울수록 거꾸로 발휘할 능력이나 활동이 작은 틀 속에 갇히게 된다. 사회적 관심을 견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낼 만큼의 큰 힘이나 역량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은 평가될지 몰라도 자족적인 운동에 그쳤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를 개혁할 힘은 한두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구할 때 이러한 기획·조직화의 역할을 해온 조직은 정당이었다. 정당은 노동조합이나 이익집단과 연계하면서 관여하는 다양한 연구소나 외국 단체를 통해 사회 곳곳의 개혁 과제를 발굴하는 등 필요한 전문가와 활동가를 끊임없이 조직 안으로 끌어들인다. 서구 사회에서 노동조합이나 각종 이익 단체, 연구소,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정당 내부의 활동가로 변신하는 것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시민단체라면 환경이나 복지, 인권 등 특정 전문 분야에서의 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한국의 참여연대나 경실련처럼 종합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게 서구에서는 종합적인 코디네이터 역할은 온전히 정당의 활동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에게 이 역할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노동조합, 시민사회, 지역공동체에서 훈련된 운동가들이 참여해 밑에서부터 조직화를 거친 끝에 만들어낸 진보 정당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현재의 수구·보수 정당은 역사적으로 군사정권 시절부터 여러 관변 단체와 결합해 당원을 충원했고, 지역의 토호를 참여시킴으로써 그 나름의 조직적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다분히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해관계에 기초해 만든 조직이라 개혁 과제를 제기하고 정치적 해결을 실현해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

현재의 야당도 특정 지역의 지역 기반 외에는 지역위원회와 같은 지역 조직이 정비되어 있지 않다. 한번은 경제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 한 야당 국회의원에게 왜 상가 권리금 보호 운동이나 주택 임차인 보호 운동, 종속적 자영업자(대리점·가맹점) 보호 운동을 정당의 지역 조직 차원에서 전개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대답은 지역위원회에는 그러한 대중운동을 벌일 조직이나 당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국회의원 몇 사람의 활동 이외에 정당 차원에서 지역 조직이나 부문 조직을 가동해 경제민주화를 대중적으로 벌여나가기는 어려운 조직 상태였다. 당원들도 당내 선거나 총선을 앞둔 공천 시기에 잠시 역할이 주어질 뿐 일상적인 정당 활동은 따로 없었다.

한편으로 한국에서 시민단체가 개혁 과제를 발굴해 사회 의제화 하고 전문가와 활동가 등을 모아 정책과 입법으로 실현해나가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정당의 취약함에도 원인이 있지만, 역량 있는 운동가들이 시민사회에 많이 참여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등에서 충분히 훈련되어 종합적인 능력을 보유한 이들이 그동안 헌신적인 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집단 자치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의 단체교섭처럼 집단적 교섭을 통해 당사자 관계에서 자치 규율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집단 자치’라고 한다. 법학에서는 거래 당사자들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계약을 체결하면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것을 ‘사적 자치’라고 말한다. 사적 자치의 이념은 경제학에 가면 ‘시장 자율’이라는 형태로 바뀐다. 그런데 이 이념은 거래 당사자는 합리적 인간들이고, 정보의 비대칭 없는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한다는 엄격한(?) 경제활동의 상을 전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나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이 대기업과 대등한 당사자의 지위에서 거래를 맺거나 교섭을 체결하고, 대기업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 행위를 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거래에 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경제적 약자들이 대기업과 대등한 교섭을 하려면 집단적으로 단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노동조합, 중소기업 협동조합, 하청·협력 업체, 대리점·가맹점 모임 등 단체를 결성해 집단적 교섭을 진행하지 않고는 대기업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을 근절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성과와 이익을 공유함으로써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면 필수적이다. 이것이 집단 자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물론 집단 자치를 통해 경제민주화의 헌법 이념을 실현해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재벌이나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경제적 약자들이 단결해 종전의 불공정한 거래 방식을 개혁하고 성과와 이익을 공유하는 기준을 만들자고 요구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담합 행위로 비칠 것이다. 실제로 공정거래법 제19조는 중소기업들이 단체를 만들어 납품 가격 협상을 주장하거나 납품 거래 조건을 정하는 교섭을 요구하는 행위를 담합 행위로 처벌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법도 당사자들이 자주적으로 지켜나가겠다고 만든 자치 법규만큼 실천을 담보하기 어렵고, 당사자들 간의 협약만큼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포함하기도 어렵다. 가맹점 점주들은 단체를 결성해 프랜차이즈 본사와 집단적인 상생 교섭을 이끌어냄으로써, 고가의 인테리어 설치 강요, 과다한 광고비 전가 같은 불공정 문제를 해결한다. 또 구매 협동조합을 결성해 본사에서 공급받는 물품 외의 재료, 부자재 등을 공동 구입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의 향상을 꾀한다.

2013년 경제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개정된 가맹사업법에 이러한 상생 교섭, 상생 협약 제도가 도입되었다. 자동차, 우유, 화장품, 음료·주류 같은 업종에는 대리점주 단체를 결성하고 집단교섭을 한 경험이 많이 축적되어 있다. 대형마트 입점 저지 투쟁을 벌인 망원시장 상인들도 상인 단체를 결성해 망원시장을 ‘명품’ 시장, 관광 명소로 바꾸어나가는 협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 상가 임대차운동 단체(맘놓고 장사하는 상인들의 모임), 청년 주거운동 단체(민달팽이유니온), 주거 세입자 단체(전국세입자협회) 등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자신들의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